Unborn 8.0 Purple Pointer 흰, 잔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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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의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좋은 뜻을 가진 한자나 단어로 짓는 것이 좋다고, 음양오행을 운운하며 이름으로 운명이 지어진다는 과장된 헛소리 같지만 어딘가 본능적으로 믿게 되는 기이한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지 않은가. 
 좋은 이름을 가졌지만 차별받는 그 수두룩 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차별을 받을 운명이라는 걸까? 절대 아니지. 
 아무튼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지만 이름이 좋은 뜻이면 좋은 거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매뉴얼(Manual)은 생각했다.

 Manual. 내용이나 이유, 사용법 따위를 설명한 글.

 운명같은 건 없고 모든 것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매뉴얼의 굳은 신념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 만큼 무력한 것은 없으니. 내용이나 이유 따위를 설명한다는 자신의 이름과는 조금 모순된 점이 있지만 정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굳은 신념을 밀고 나가는 단단한 힘은 매뉴얼의 올곧은 심지였다. 
 허황되지만 쓸모는 있을 생각을 하며 매뉴얼은 담뱃재를 턴다. 어차피 세상은 모순 투성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며. 
 매뉴얼 연구원 님! 
 부하 직원이 흡연실 밖에서 매뉴얼을 부르자 거진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고 흡연실을 나간다. 아롱거리던 담배 연기가 문 틈으로 매뉴얼을 따라서 슬며시 나오다가 이내 사라진다.

***

 컴퓨터의 활자들이 점멸하며 흐려진다. 꿈뻑꿈뻑. 졸면서 저도 모르게 손이 닿아있던 키보드의 자판을 몇 번 누른 것 같기도 하다.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자 이내 잠이 깨는 듯 싶더니, 매뉴얼은 꿈을 꾸고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컴퓨터의 활자들이 제 자리를 잃어 아무 곳에서나 오류가 난 듯 부들거리다가 하얗게 사라진다. …사고가 정지되어 연신 뭐야,를 외치니 옆 자리 연구원이 탄식을 내뱉는다. 아이고… 연구원 님, 저장은 하셨어요? 걱정 섞인 물음에 매뉴얼이 희미한 조소를 띄우자 옆 자리 연구원은 눈치보며 슬금슬금 제 자리로 간다. 이 망할 놈의 컴퓨터. 나쁜 컴퓨터! 
 아침 댓바람부터 나쁜 컴퓨터 덕분에 매뉴얼은 연신 담배를 물고 들이 마셨다 내뱉는다. 하얀 연기가 아롱거린다. 잠을 잘 못 잤는지 회사 때문인지 뒷목께가 뻐근하다. 꽁초를 비벼 끄고 제 자리로 돌아가니 하얀 화면에, 어떤 문장이…….

 Is ther anyone ?
 거기 아무도 없나요 ?
 
 컴퓨터에 천천히 쓰여지는 글자가 기묘하다. 벙쪄서 하얀 화면에 검은 글자만 바라보니 이게 뭔가 싶다. 매뉴얼은 옆 자리 연구원을 불러 모니터를 향해 손짓하자 옆 자리 연구원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문장이 전부 사라지고 이전의 그 하얀 화면 뿐이다. 엥? 무슨 글자가 떴었는데. 재부팅하라는 거 아니었을까요? 매뉴얼이 그런가,하고 컴퓨터 선을 뽑고 다시 꽂자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온다. 저장하지 않았던 보고서도 그대로다. 이런 기적같은 일이! 내가 보고서를 오늘까지 내야 한다는 운명이 작용되었다면, 운명 님 정말 감사합니다!
 


2.

 보랏빛 형체는 생각한다. 그 존재는 생각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 가끔씩 오류가 난 듯ㅡ자신에게 오류가 나는지, 이 공간에 오류가 나는지, 이 공간이 자신인지, 머릿 속인지, 어디인지도 분간도 하지 못했으나ㅡ 어느 한 부분이 지직거리거나, 어둠이 환해져 흰 빛으로 존재하게 될 때, 아주 가끔, 존재한다는 느낌. 그 뿐, 아무 것도 없었다.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를 가늠하는 것에 불과할 때 문득 어느 한 구석이라고 추정되는 장소가 지직거리다가 이내 빛줄기가 새어나간다면, 하얀 빛이 새어나가는 그 갑작스러운 작은 공간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분명 운명일 것이리라. 

 거기 누구 있어요?
 아무도 없나요?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건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어느 사람, 다른 존재. 그 형형한 연둣빛 눈에게 관통당했을 때, 아득하고 흐린 정신이 순식간에 걷히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껴버린다. 그러나 다시 어둠에 휩싸여 혼자가 되고. Alone? 여태껏 혼자라는 단어와 의미를 생각한 적이 있던가? 
 제 손을 쥐었다 펴 본다. 손ㅡ그러나 내게 손이라는 신체가 존재했던가?ㅡ이 흐릿하지만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다를 것 없이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깜빡, 하는 순간 하얀 공간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가, 다시 눈을 깜빡, 하자 어두운 공간이 다시 하얗게 변하는 것도 다를 것 없었다. 

 하얗게 침묵했다. 다시 그 작은 틈으로 다른 사람, 그 존재가 나타나주기를 기다리며. 그제서야 또렷이 깨닫는다. 보랏빛 형체가, 나 자신이 존재한다면 다른 존재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음을. 그리고 언제나 그 다른 존재를 확인 하고 싶었다는 것을…….

***

 그러나 매뉴얼은 쓰다 만 보고서를 이어서 작성하다 이내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급기야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한다. 뭐지? 뭐였을까? 인터넷에 접속해 검색해본다. 해킹… 아니, 원격 조종 해킹…? 해킹범이 컴퓨터를 해킹해서 대놓고 컴퓨터 주인을 찾던가? 해킹이 처음이라 자신도 신기했다던가? 그러나 보통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마를 가벼이 쥐고 수많은 활자들을 읽는다. 그 투명한 벽을 사이로 두고 매뉴얼을 온통 호기심으로 물들인 존재가 직접 지켜보고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

 - 해킹? 그게 뭐죠? 
 - 그것은 제 이름인가요?
 - 이름? 아, 난 이름이 없어.
 - 나는 뭐지?
 - 당신은 누구죠?
 
 매뉴얼은 어이와 넋이 둘 다 나가 한동안 글자를 쓰지도 못 한 채로 제멋대로 깜박이는 커서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매뉴얼은 멍하니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솓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름도 없이 'SCP-BT-014'라는 일련번호로 불리는 그 기묘한 존재가 떠오른다. 외형도 없이 하얀 화면에서 연구소 내에서만 발생한다는,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해 연구조차 못 하고 행방이 묘연한 존재. 아니, 애초에 존재한다고 정의를 내려도 괜찮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매뉴얼은 언젠가 선배 연구원에게 그것을 들었을 때 그냥 바이러스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면 선배는 그것도 모르겠다고, 무언가 나쁜 짓을 하지는 않고 그저 온통 질문을 쏟아붓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추정되는 바로는 검은 금요일의 잔재라고들 하던데……. 말 끝을 흐리던 선배는 분명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붓던 존재가, 끔찍하게 잊을 수도 없는 그 금요일과 관련된 것 같지가 않아 반신반의 했던 것이리라. 

 'SCP-BT-014'
 
 아, 나는 참……, 하필. 일을 평생 할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매뉴얼은 종이에 수기로 글을 썼다.
 'SCP-BT-014'의 발현 보고서…?
 눈썹을 찡그리며 뒤에 물음표를 붙인다.



3.

 또 이 무채색의 공간.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미묘한, 끝이 없을 듯 사방이 온통 눈부시게 희고 아무 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기묘한 공간은 늘 아득하다. 생명력도 없이 고요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흐린 정신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희미하게 느낄 뿐이었다. 매 순간이 외로움에 짓이겨지는 고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다른 존재를 기다리게 되는 것은 분명 운명일 것이리라. 
 'SCP-BT-014'는 과거 언젠가 보았던 사람들의 눈을 되새긴다. 그래, 눈. 그 눈빛들. 다른 존재들의 눈과 조우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껴버렸지. 그러나 그 느낌은 얼마 안 가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고 존재함을 확신하던 마음도 흐려졌었다. 그게 희미함 속의 사소한 변화였건만.
 'SCP-BT-014'는 바로 얼마 전에 보았던 그 사람의 형형한 눈빛을 떠올린다. 연두색 눈빛은 대단하게도 강렬했고, 그 눈빛에 관통당했을 때, 아득하고 흐린 정신이 순식간에 걷히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껴버린다. 희미함 속의 사소한 변화일 것이리라 믿었지만 이번은 뭔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언제나 침묵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얀 화면에 하얀 캘린더가 떠오른다. 온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짜그라드는 고통에 숨을 헐떡인다. 숨을, 헐떡여? 내가? 제 손을 쥐었다 펴 보는 순간 그 사람의 연두색 눈빛이 뇌리를 스쳤고, 자신이, 살아 숨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이……, 그러니까, 금요일, 인데도. 주변을 둘러본다. 다를 것 없이 암울하게도 아무 것도 없었다. 
 다시 그 작은 공간으로 그 사람이 나타나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투명하게 침묵했다. 투명해지면서, 아득해지면서, 그제서야 또렷이 깨닫는다. 외로움의 색은 분명 무채색일 것이다.

 같은 순간, 매뉴얼도 정신이 부웅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새하얀 공간.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백지인 마냥,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메모장의 하얀 화면 마냥, 깜빡이는 커서는 없고. 정신이 깜빡이는 것을 느끼며 꿈인가, 한다.
 새하얀 공간에 대비되는 그 부정적이고 불안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의 형체? 깜빡이는 정신이 마치 오류처럼 지직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 내가 여기 존재하는데 어느 그 누가 환상체라는 거죠?

 삐삐삐삐!
 ……출근할 시간이다. 

***

 기숙사 방 창문으로 허연 빛이 들어 올 무렵. 매뉴얼은 부스스 일어나 잠이 덜 깬 상태로 몽롱하게 생각한다. 내가 커튼을 열고 잤던가? 눈을 꿈뻑이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가 씻을 때에도 몽롱한 것은 여전하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던 참에도, 내가 신발을 이렇게 깔끔하게 벗어놨던가? 야근을 너무 많이 한 탓을 하며 사소하고 상관없을 의문들을 집에 두고 매뉴얼은 어김없이 출근을 한다.
 잠을 잘 못 잤나. 뻐근한 승모를 주무르며 기숙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내 카페에 들어가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멍하니 창 밖을 본다. 끔뻑끔뻑. 요즘따라 몸이 무겁고 정신이 멍하다. 전부 다 회사 탓이다. 일을 할 팔자인 탓이다……. 한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할 판이구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며 혼잣말한다. 매뉴얼은 카페 직원에게 인사를 한 뒤 타 연구소로 가는 길에도 스트레칭을 한다.
 제 자리로 돌아가니 연구원들의 모든 컴퓨터가 하얀 화면에, 소란스러운 연구원들에, 꿈 속에서 보았던 그 여자가 새하얗게 웃으며……,

 "드디어 만났다!"

 이름도 없이 'SCP-BT-014'라는 일련번호로 불리는 그 기묘한 존재. 어깨에 닿는 보랏빛 머리카락, 곱슬거림을 넘어 포슬포슬해 보이는 머릿결. 하늘을 담은 듯한 눈. 매뉴얼 꿈 속에서 하얗게 아롱거리던 그 여자와 같아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왼쪽 눈만은 새카맣게 탄 역안이었고 그 타고 남은 잿더미같은 역안 가운데에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있었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데 어느 그 누가 환상체라는거냐며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며 눈을 빛내며 저를 올려다보는 천진해보이는 그녀가 끔찍하게도 잊지 못 할 검은 금요일의 잔재라는 것을, 매뉴얼은 그 잿더미같은 역안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금요일의 잔재가 매뉴얼의 컴퓨터에서 발생되었다. 미신같던 그 존재가 지금 갑자기 발생되고 나 여기 있다고 내 꿈까지 찾아 들어오고선, 기어이 눈 앞에 나타났다고? 전례없는 상황에 연구실 연구원들은 부산스럽게 윗선에게 메신저와 전화를 돌린다. 매뉴얼은 곧 올려야 할 보고서에 환상체가 사람의 무의식에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넣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환상체 아니라니까요?"

 그녀가 뒤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한 연구원이 다급히 그녀를 저지시키며 격리실에 데리고 간다. 아이고 두야……. 내 팔자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싶다.
 


 4. 

 몇 시간 뒤, 보고서 서류와 급한 회의를 힘겹게 처리한 매뉴얼이 퀭한 눈으로 격리실에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오셨네요!"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특정 요일이라던가……, 그럴 때 네가 만일 폭주하면 나는 널 힘으로 제압하여 포박해야하고,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보고서에 써야하고, 네 샘플을 채취하고, 밤 시간에는 격리실에, 낮 시간에는 보호관찰실에 있어야 할 거야.
 그러나 그녀는 꿈 속에서 본 것 처럼 새하얗게 웃으며,

 "내가 어디에 존재하던지 상관없어요. 나는 그저 당신과 대화하는 순간을 고대해요."

 매뉴얼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외면하며 종이에 글을 쓴다. 'SCP-BT-014'의 의사소통 취재기록 1.
 : 첨부/'SCP-BT-014'의 의사소통 취재기록 1.
 :  "좀 어때?"
 "갑자기 뭐가요?"
 "됐다.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편하게 생각나는대로 대답하도록 해."
 "네!"
 "연구소 내에서 발현된 적은 있지만 잠시동안 추상적인 질문들을 늘어놓고 금방 사라진 존재가 있었어. 그게 너니?"
 "맞는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
 "음……. 전생같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져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나에게 덮어씌우기 된 것 처럼요."
 "그래. 그럼 이렇게 발현되고 형체까지 나타나게 된 이유가 있니?"
 : 파일 삭제됨.

***

 'SCP-BT-014'는 금요일마다 이상행동을 한다. 
 : 첨부/'SCP-BT-014'의 이상행동 보고서.
 : 파일 삭제됨.

 매뉴얼은 금요일마다 더해지는 무게감을 견디면서도 음울하게 허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기억이 정말로 덮어씌우기 된 거라면, 누가 어떻게, 왜? 매뉴얼은 그것을 알 방도가 없었으니 그저 연구실 밖 감시실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진정제를 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촉촉한 눈가로 보이지도 않을 터인 감시실 쪽을 향해 무언가 말 하려는 듯 입을 오물이다 끝내 시선만 바닥으로 떨군다.

 그녀가 초점도 없이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연구실에 새하얀 연구복을 입은 그녀는 새하얗게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 무표정을 보고 있어야 할 때면 매뉴얼은 아니 내가 이러려고 입사를 했나,하는 생각도 든다. 매뉴얼 연구원은 거의 담당 연구원이다싶이 그녀가 괴로워 몸부림 칠 때에는 힘으로 제압하여 포박해야했고, 그녀가 슬퍼 할 때에는 눈물을 채취하여 보관해야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보고서에 써야했다. 그녀 앞에서는 고글과 마스크를 반드시 해야했고 감시실에서만 일을 하니, 그녀가 굉장히 외로워한다는 사실도 매뉴얼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밤 시간의 격리실에 감금시켜야 할 때에도, 누군가 들어와 샘플채취를 할 때에도, 낮 시간의 보호관찰실에 풀어줄 때에도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태던지 쉼 없이 질문한다. 심지어는 울고있는 와중에도. 오늘 뭐 드셨어요? 지금 날씨가 어때요? 무슨 계절이 좋아요? …그러나 모두 침묵해야한다.



5.

 매뉴얼은 뻐근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기숙사실로 들어간다. 잔업이 남았으니 자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너무 피곤하니까 한 삼십 분만 잘까……. 한숨을 뱉고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으며, 내가 신발정리를 했던가? 외투를 걸어 놓을 때에도, 내가 이불정리를 안 하고 나갔던가? 방으로 들어가서도, 책이 왜 떨어져있지? 뭔가 이질적인 집안이 약간 수상했으나 매뉴얼은 개의치않으며 이불을 덮는다. 이 망할 놈의 일은 끝나지가 않는 것 같다고, 이 망할 놈의 일의 원흉인 그녀를 생각한다.
 사실은 싫지 않지만서도. 매뉴얼 본인도 환상체 연구가 흥미롭고 재미있어 담당 연구원처럼 굴었으나, 딱 하나, 그녀에게 원망스러운 점은 해당 연구소 내로 전자기기의 출입이 불가하므로 전부 수기로 직접 써야하는 산더미같은 서류들. 뻐근한 어깨와 뻐근한 손목. 지긋지긋하게 꼬불거리는 글씨들! 망할 사파놈들! 글씨도 개 못 쓰고! 
 매뉴얼은 갑자기 화가 솟구치다가 진정한다. 잠이나 자자, 잠이나…….

***
 
 A cumbersome and heavy body.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몸.

***

 꿈을 꾸었다. 깨고나면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듯 기억이 없는 꿈을 며칠째 꾸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흰 공간이었다는 것 밖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매뉴얼은 익숙하게 일어나서, 낯선 향기를 맡았다.



6.

 그렇게 보호관찰을,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매뉴얼이 3등급 연구원으로 진급한 뒤, 박사가 되고나서부터는 담당이 되어 보호관찰 및 연구를 하고있다. 그녀가 검은 금요일의 잔재로 불리지 않고 부디 세상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길 기대하며.

 일을 다 제쳐두고서 매뉴얼은 눈을 감고 그녀와 함께보낸 시간들을 회상한다. 함께 있었던 보호관찰실과 격리실과 샘플채취실과 연구소 복도, 연구소 입구에 잠깐 나가는 것을 허락받았을 때 뛸 듯이(정말로 뛰었지만) 기뻐하던 그녀의 모든 순간들을.
 그녀와의 모든 순간 속에는 쉼 없는 질문이 있다. 밤 시간의 격리실에 감금시켜야 할 때에도, 누군가 들어와 샘플채취를 할 때에도, 낮 시간의 보호관찰실에 풀어줄 때에도. 오늘 뭐 드셨어요? 밖은 날씨가 어때요? 박사님은 무슨 계절이 좋아요? 모두 침묵해야 하지만 매뉴얼은 침묵하지 않았다. 제육덮밥 먹었다. 밖에는 비 와. 나는 겨울이 좋아. 

 매뉴얼이 흡연실로 들어가자 그녀가 어떻게 나왔는지 대뜸 따라 들어온다. 

 "뭐야! 야 너, 어떻게 나왔어?"
 "전 하얀 게 좋아요."

 주변의 모든 것이 눈부시게 희고 모든 것이 힘겨워서 빛 속을 헤매는 것 같았어요. 그런 자각을 할 때면 정신이 아득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아서,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 일이 몇번인가 반복되고 나서는 자신이 진짜 존재하는 것인지도 헷갈리던 와중에 나를 만나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래도 익숙한 것을 찾는 것은 여전한가봐요, 덧붙였다. 왜냐하면 나는 하얀 게 좋아. 하얀 눈이 오는 겨울이 좋아. 하얗게 시리고 하얗게 춥고 하얗게 흐려지는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하얗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매뉴얼은 하얀 담배연기를 내뱉는다. 

 "넌 보라색이야."
 "뭐래."


 :첨부/'SCP-BT-014'의 금요일관련 취재기록.
 :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오늘 목요일이야. 내일도 괜찮을 것 같아?"
 "……알면서. 왜 물어보시는 거죠?"
 "알잖냐, 연구를 위해서인거."
 "모르겠어요. 박사님은 항상 그 옷만 입으시네요."
 "내일도 이 옷을 입을 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내일도 제 정신으로 버텨준다면 다른 옷을 입을 수도."
 "……."
 "……무섭냐? 괜찮아, 말해도 돼. 네 앞에 내가 있잖아."
 "그, 제 눈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왼쪽 눈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존재가 나를 투과해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잘은 모르겠어요.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저는 저를 빼앗기는 것 같아요. 하얗고 두려운 공간에 또 홀로 남겨진 것 처럼."
 "금요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
 "……."
 "피곤해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무언가에게에서 도피하려 할 때면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 매뉴얼은 그녀가 눈을 감는 것이 곧 사라질 사람처럼 희미하게 느껴져서 무서웠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두려움에게서 도피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할 사실이다.
 그렇게 잠깐의 두려운 침묵이 끝나면 그녀는 또 쉼 없이 묻는다. 오늘은 뭐 드실 거에요? 오늘은 날씨가 어때요? 같이 나가보면 안 되나요? 당신은 무슨 계절이 싫어요? 
 모든 질문에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봄에는 온 세상을 색색으로 물들이는 꽃들과 아직 여린 잎들, 노랗고 포근한 햇살. 여름에는 청량한 햇볕과 청량한 잎들의 눈부신 그늘. 가을은 물감처럼 물들어 떨어지는 낙엽과 빨갛게 익은 햇살. 겨울은 오면 온통 새하얗고 포근하게 눈. 왜 그 모든 것들이, 예전이라면 심드렁하게 지나쳤을 작고 사소한 것들까지도, 왜, 왜 좋았을까. 왜?

 매뉴얼도 눈을 감는다.



7.

 너는 기어코 뭐든 해낼 사람이야.
 매뉴얼은 'SCP-BT-014'에게 그리 말했다.

 "네가 이 세상에 좋은 변화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가까워져선 안 되는 존재지만. 그녀가 그렇게 물 밀 듯 밀려오면 매뉴얼은 난감했다. 그게, 그러니까……, 그렇게 싫은 느낌이 아니라서……. 매뉴얼은 또 눈을 감고 찡그린다. 혼란스러움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매뉴얼은 눈을 떠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마음 속에서 어떠한 버튼이 눌려 기어코는 마음이 솓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버튼."
 "네?"
 "네 이름."

 버튼으로 하는 게 좋겠다.
 버튼이 눈부시게 웃었다.

***

 버튼은 고대한다. 그 사람과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을, 대화를, 실험과 채취도. 그의 곁엔 언제나 버튼이 있다. 그가 보일 때에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머리 위에, 등 뒤에, 눈 안에, 손 안에, 품 안에, 머리 안에……. 어디든지.
 나는 당신이 궁금해. 그 눈에 나를 더 담아줬으면 좋겠어. 가까이, 더 가까이. 
 봄이 오면 꽃들 사이의 나를, 여름이 오면 바다를 첨벙이는 나를, 가을이 오면 물감처럼 물든 낙엽들을 밟아 걷는 나를, 겨울이 오면 새하얗고 포근하게 내리는 눈 속에서 함박웃음 짓는 나를. 나의 모든 것들을.

 운명같은 건 없고 모든 것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거라고 말하는 매뉴얼의 말을 버튼은 방글방글 웃으며 들었다. 
 나는 이곳에 존재해. 당신을 만나려고 온 것 같아. 내가, 당신을 만나는 것은 분명 운명일거야.

 매뉴얼은 버튼에게 말했다. 사람의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고, 그래서 이름을 좋은 뜻을 가진 것으로 짓는 것이 좋다고. 너는 어떤 일이든 버튼 누르는 것 처럼 죄 해낼 사람이라고. 매뉴얼은 이 백지같은 아이에게 희망을 건다. 네트워크 바이러스를 없애는 방법을 터득하기를, 능력을 범죄에 사용하지 않기를, 더 넓은 가상공간의 활용을 가져다주기를, 부디 세상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기를,
 스스로 행복을 터득할 수 있기를.
 
***

 오늘은 실험을 위해 전자기기를 연구소 내로 반입하는 날이다. 온라인 네트워크가 없는 공기계. SCP-BT-014의 현재 모습은 위험성이 없다 판단하여, 가상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다. 매뉴얼은 여전히 고글과 마스크로 무장 한 채로. 

 "SCP-BT-014."
 "버튼이라면서요."
 "실험체와의 거리유지가 원칙이라."
 "무슨 일을 하려는 거죠?"
 "네가 전자기기에 들어가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버튼, 네가 부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게요."
 "진짜?"
 "네. 당신이 하는 거라면, 뭐든지."
 "그래……. 이동 해 봐."

 전자기기 속의 버튼은 형체가 없다. 목소리만이 확인 될 뿐. 버튼이 들어간 전자기기의 화면은 늘상 하얗다. 매뉴얼은 그 것을 하얀 형체라고 정의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 것도 없네요."
 "당연하지."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죠?"
 "어떤 프로그램을 설치할 거야. 자유롭게 반응하면 돼."

 버튼은 프로그램 안의 내용을 복사하고, 붙여넣고, 그 안에 직접 활자들을 새겨보고, 그 활자들을 움직이고, 프로그래머도 해독하기 어려워하는 암호를 자유롭게 풀어버린다. 성공적이다.

 "네가 이 세상에 좋은 변화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8. 

 버튼은 빙긋 웃고선 말했다. 파도가 되고 싶다고. 매뉴얼 앞에서 까치발을 서고 눈을 맞춘다. 
 당신의 별을 찾아서 거기서 살고싶어. 어린왕자처럼 말이에요. 장미 한 송이를 키우고, 아니야, 튤립이 좋겠어. 튤립을 키우고 별빛을 마시고 아무렇게나 당신 별 위에 누워자면서 그렇게 살고싶어요.
 당신의 별에서. 마음대로. 
 당신 마음 속에서.

 "당신이 나를 만난 것이 사고였잖아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만났다는 사고를 오래오래 기억할까요?"
 "그렇지, 아무래도. 너는 존재가 기묘한 사람이니까. 야 그래도 사고라는 표현은 좀……,"
 "내가 사라져도?"
 "……. 넌 사라질 수 없어."
 "그건 그래."

 버튼은 또 희게 웃었다.
 매일 밤 마다 감금 격리실에서 매뉴얼 박사가 나오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 그 꿈에 점점 말라가는 줄도 모른 채로. 그렇게 무거운 기분으로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운명은 없고 모든 건 스스로가 개척해나가는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매뉴얼이 자신에게 기대를 걸수록 버튼은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좁은 감금 격리실에 갇혀 결코 아무 것도 해내지 못 하리라는 불안한 확신이 드는 것만 같아 눈을 감는다. 그제서야 또렷이 깨닫는다. 외로움의 색은 분명 무채색일 것이다.
 
 : 첨부/'SCP-BT-014'의 의사소통 취재기록 1.
 : 파일 삭제됨.
 
 
 
9.

 온통 하얀 공간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실험 쥐 하나. 버튼은 그 실험쥐를 내려다본다. 하얀 털에 빨간 눈. 빨간색 눈이라……. 딸기가 먹고 싶다. 그럴 때면 버튼은 곧바로 누워 눈을 감고 자유로이 딸기를 먹는 상상을 한다. 그런 자유로운 상상을 할 때마다 버튼은 이 세상에서 희미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험쥐가 버튼의 곁으로 다가와 손 끝의 냄새를 킁킁거리지만 버튼은 그 간지러움이 숲 속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풀꽃이 간질이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이내 믿는다. 기분좋게 미소 짓는다.
 정하는 것은 자신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내가 있을 곳을 정하는 것도 나예요. 나는 멀리멀리 떠나 바다에 가고 싶고 강가에 가고 싶어요…….


 매뉴얼은 유리 너머로 버튼을 건조하게 바라보다가 종이로 시선을 돌리고 글자를 쓴다. SCP-BT-014의 사회화 실험 일지. 내용, 실험쥐 투입. 결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음. ……이상하다. 분명 버튼은 내게 동물이 좋다고 말했는데. 인간 빼고 모든 동물은 사랑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 했는데. 실험용 쥐를 넣어서 그런가? 
 …그러나 강아지도 고양이도 토끼도 햄스터도 새도 기니피그도 버튼은 무시했다. 누워서 꼼짝않고 미소지을 뿐이다. 이건 무슨 경우지? 하지만 버튼의 존재는 전대미문이기에…… 아니, 버튼은 인간이다. 좋은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믿는다. 매뉴얼은 보고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관두고 이내 녹음기를 들고 버튼의 보호관찰 연구실로 들어간다.
 매뉴얼이 들어서자 그제서야 눈을 뜬다.

 "안녕하세요."
 "뭐 하고 있냐?"
 "으음, 방금은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산책? 누워만 있던데."
 "운명을 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셨죠."
 "그랬지."
 "근데 나는 여기 갇혀서 아무 것도 하지 못 하니까. 평생 여기 썩어있는 게 내 운명인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내가 있을 곳을 찾아 떠나는 거예요."
 "무슨 뜻이지? 연구실 안에만 있는 게 괴롭다면 통제 하에 연구소 밖을 잠깐 나갔다와도 되냐는 허가를 받아줄 수도 있어."
 "그게 아니야……."
 버튼은 허공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는다. 눈을 뜨고 있어도 시선을 맞춰 줄 사람 따위는 없으니. 적막한 침묵이 맴돈다.
 "내가 전자기기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것 처럼, 나는 내 상상 속에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말해줄래?"
 "길거리를 걸어다니고, 한적한 숲 길을 걸어다니고, 강가에 도착하면 물 속의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햇볕도 쬐고……. 뭐 그런 것들요. 당신이랑 같이."
 버튼은 힘없이 눈을 뜨곤 매뉴얼의 고글 안으로 애써 시선을 보낸다.
 "근데 내 상상 속엔 당신의 얼굴이 없어."
 슬프게 웃는다.
 "나 소원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말 해봐."
 "내 눈을 뽑아서 어디든지 괜찮으니 이 연구소 밖으로 가져다 주세요."
 "뭐? 안 돼!"
 "제발, 마지막 소원이에요."
 "왜 마지막인 건데? 그리고 이유가 뭐야?"
 "당신이 나를 만난 건 사고였으니까……."

 실패한 영혼의 색 또한 무채색일 것이다.
 
 "가져가서 연구를 하든 뭘 하든간에 밖으로 가져가주기만 하면 돼요. 싫다면 나는 내 눈을 찌를거에요. 당신들이 그렇게나 열심히 하던 게 샘플 채취 아니었나요? 샘플을 잃을 건가요, 아니면 직접 가져갈 건가요?"
 "뭐? 아니,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아니면 뭐요? 피부? 이빨? 손톱? 폐? 장기? 뼈? 무슨 며? 갈비뼈? 빗장뼈? 정강뼈? 경추뼈? 아니면 골수? 혈액? 눈물? 어쩌지, 내겐 이제 금요일이 없을 텐데."
 "버튼."
 "네."
 "왜 그렇게 말을 해……."
 
 질렸어요.
 모든 게 희미하다.
 


End.

  내가 누군지 알수 없어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어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게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 모르는 채로 계속 살고 싶어. 하지만 내가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싶지 않아.
 나는 나에 대해 말한 적 없어요.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나라고 말 할 자격이 있었나. 언젠가 붙여주었던 그 이름이 나를 지칭할 자격이 있었나. 
 우리가 함께 가진 것들이 있었나요. 전혀 없기도 하고 전부 가지기도 했지요. 사계절의 모든 것과 그 모든 우리의 시간들. 가령 사라진들 사라진 게 무엇이겠어요.

 소리없이 사라졌었어요. 당신 이불 속으로, 당신의 품 안으로, 당신 꿈 속으로. 그리고 강을, 바다를, 산을, 도심을, 숲 속을. 이 세계와 저 하얀 세상을. 갈 곳 없이 정처없이 사라지고 사라졌어요. 그리고 나는 또한 사라질 거예요. 나는 이 하얀 세상을 조각조각 부술 거고 곧 작별인사를 할 거에요. 조각난 하얀 세계는 조율되지 않은 바이올린처럼 시끄럽고 머릿속에 비명이 가득해요. 그러나 당신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은 나를 원망하나요? 내 눈을 가져가지 못 해서? 내 얼굴을 내 팔과 다리와 손을 가지지 못 해서? 내 심장을 뜯어내지 못 해서? 아니 죄송해요 이제 당신 귀찮게 안할게요. 이제 실험할 형체도 없을 거에요. 이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몸은 질렸어요. 그래서 나는 이 하얀 실험복을 벗고 잘 개어서 두고 떠날거에요. 그럼 당신은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겠죠. 그러나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이 나를 만난 것은 아주 작은 사고였을 뿐이니까…….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 된다면 나는 늘 당신 곁에 있을 거에요. 
 
당신은 사랑스러워. 그러나 내게 사랑스러움은 흉기예요. 나는 당신에게 관통당한거야. 그렇게 쪼개져서 가루가되어 사라진거야. 누구의 탓도 아니야. 나는 그저 사고였을 뿐이니까…….




Ps.

 https://youtu.be/4o0WYiK52Dg?si=MHw2DiaGbZ5iBE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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